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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모든 여성들의 가출을 응원하다!“자기 자신을 찾아 집을 뛰쳐나온 ‘노라’처럼
나는 노명자가 아닌 노라가 되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85세의 패션디자이너 노라노는 오늘도 변함없이 옷을 만들고 있다. 그녀는 1956년에 한국 최초로 패션쇼를 개최하고,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 펄시스터즈의 판탈롱을 스타일링한 장본인이다. 그리고 노라노는 1963년에 최초로 디자이너 기성복을 생산하기도 했다. 더 저렴한 가격에 더 멋진 옷을 만들어, 이제 막 사회에 들어선 많은 여성들을 응원하고 싶었다.
60여년을 넘게 여성을 위해 옷을 만들어온 그녀는 지금,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젊은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자신의 패션사를 정리하는 전시회를 준비한다. 옛 의상을 복원하고, 옷과 함께 흘러온 자신의 인생과 그 시대를 다시 무대에 올린다.
나는 옷을 통해
여성의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
[ SPECIAL TIP ]
한국의 코코 샤넬, 노라노
1928년 경성에서 태어나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44년 일본군 위안부로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결혼을 택했으나 자신이 꿈꾸었던 삶과는 다른 방향이라고 판단, 이혼을 택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자신의 권리를 찾아 남편에게 이혼을 선고하고 집을 뛰쳐나간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노명자’에서 ‘노라노’로의 삶을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패션쇼를 개최, 한국 최초로 기성복 도입, 국내 브랜드 최초로 미국 Macy’s 백화점 입점 등 한국 패션사의 주요한 순간들을 만들어 냈으며, 윤복희의 미니 스커트, 펄 시스터즈의 판탈롱, 엄앵란의 햅번 스타일 등 여성들이 욕망하는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2012년에는 60주년 기념 전시회 ‘라비 앙 로즈 La Vie en Rose 展’을 통해 반세기를 거쳐 온 패션 인생을 회고 하였으며, 만 85세인 지금도 변함없이 가위질을 하고 있다.
★★★ 노라노 반세기 패션사 ★★★
1928 - 경성 출생
1944 - 17세, 일본군위안부로 징집되는 것을 피해 일본 대위와 결혼
1946 - 19세, 이혼
1947 - 한국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 비행기 승객이 되어 미국유학
1949 - FRANK WAGGON TECHNICAL COLLEGE 졸업 (U.S.A)
1952 - ‘노라노의 집’ 개업 (서울명동)
1954 - 최은희를 시작으로 최지희, 김지미, 문정숙, 문희 등
당대 최고 여배우들의 영화 의상을 담당
1956 - 국내 최초의 패션쇼 개최 (BANDO HOTEL 서울)
1959 - 미스코리아 오현주의 샤프롱으로 한국 최초로 미스유니버스대회 출전
1962 - HAWAII HONOLULU ALAMONAD BRANCH STORE 오픈
1963 - 국내최초 기성복 패션쇼 개최 (현, 미도파 백화점)
1966 - TV의 대중화와 함께 1966년 전향이를 시작으로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윤여정, 윤소정, 윤복희, 펄시스터즈 등 TV 스타들의 의상 협찬
1974 - 한국 브랜드 최초로 미국 Macy’s 백화점에 입점
1977 - 주식회사 예림양행 설립 (충무로)
1978 - NEW YORK 7TH Ave. ‘NORA NOH INC’ 현지법인설립
1990 - NORA NOH HONG KONG 설립
1990 - NOTA NOH JAPAN 설립
2007 - [노라노, 열정을 디자인하다] 도서 출간
2010 - [한국패션대상]에서 ‘대통령상’ 수상
2012 - 노라노 60주년 기념 전시회 ‘라비앙로즈 La Vie en Rose展 ’ 개최
2013 - 다큐멘터리 <노라노> 개봉
★★★ Thanks to 노라노 ★★★
“노라노 선생님은 옷을 통해 사회의 고정관념을 확 뒤집어버렸다”
가수 윤복희
“감독은 연기자를 연출하지만 노라노 선생님은 전체 의상을 연출하셨다.
대중문화의 기수였던 것”
배우 엄앵란
“나도 노여사님도, 열과 열이 부딪치는 그런 느낌으로 일을 했다.
그 정열을 따라갈 사람은 없을 거다”
배우 최은희
“대본이 나오면 모든 배우들이 바로 노라노 선생님을 찾아갔다.
‘영화 의상의 사령탑’이었던 것”
배우 최지희
“코코 샤넬, 소니아 니켈,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과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내 나라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
이제는 대한민국 패션史의 뿌리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스타일리스트 서은영 (노라노 60주년 기념 전시회 ‘라비앙 로즈 La Vie en Rose展 ’ 기획)
“내가 염색한 미군 군복 바지를 입고 다니던 전후의 그 극빈한 시절에도
어딘가에 패션계가 있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소설가 박완서
“이럴 때의 감동이라는 말만은 꼭 한자로 쓰고 싶다.
感動-느낌의 감과 움직임의 동이라는 뜻이다.
느낌이 있어야 움직이고 움직임이 있어야 느낀다.
그것이 패션 60년의 노라 노의 삶이며 그 행동의 원리이다.
한 때 많은 한국 여성이 입센의 드라마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노라를 동경하여
울타리 밖으로 나갔지만 대개는 다 가혹한 세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아니다.
막히면 통한다는 의지, 결과 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불타는 한 여성의 모험은
끝내 불모의 이 땅에 디자인 나라를 만들어 냈다.”
문학 평론가 이어령
“패션 디자이너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정답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
제일모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구호 전무
“그 옛날에 만들어진 옷임에도 불구하고 노라노 선생님의 옷은 매우 모던하다.
지금 입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디자인에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다”
디자이너 스티브J & 요니P
“경이롭다고 느낀 부분은 경계라는 부분들을 규정짓지 않고 넘나드셨다는 것.
최초로 기성복 패션쇼를 했다는 것도
그 당시에는 굉장히 용기를 내야 하는 행동이지 않았을까”
디자이너 최철용
“패션이라는 컨셉 자체가 없었던 시절에
옷을 단순히 의복으로만 보지 않고
패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바라보셨던 것이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이다”
디자이너 홍혜진
“노라노 선생님이 없었다면,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지금처럼 해외에서 활약할 수 있었을까”
디자이너 강동준
“우리나라에 패션이라는 단어를 던져준 분이라고 생각하니 무척 놀랍다”
디자이너 이승희
“‘트렌드나 유행은 금방 지나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그 말 처럼, 대중들에게 스타일에 대한 스타일링을 접목하고
표현해주셨던 부분이 디자이너로서 존경스럽다”
디자이너 이석태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 때 ‘노라노’라는 폰트자체만 봐도 가슴이 설렜다.
노라노 선생님이 ‘패션의 어머니’시고 ‘뿌리와 혈통’이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
노라노 선생님이 있기에 일제시대부터 패션이라는 것이 이어져 왔고,
우리는 그 공기를 마시면서 패션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 박윤수
[ HOT ISSUE ]
‘앙드레 김’ 이전에 ‘노라노’가 있었다!
대한민국 패션계, 뿌리를 찾기 시작하다
10월 31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노라노>는 국내최초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의 반세기 패션사를 담은 작품. 세계 명품 브랜드 ‘샤넬’이 탄생하기까지의 일대기를 담은 <코코 샤넬> (2009), 20세기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화려한 성공에서부터 죽음까지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 (2011), 스타일 아이콘 샤넬과 20세기 천재 음악가 스트라빈스키의 로맨스를 담은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2011) 등 해외 패션 거장들의 삶을 담은 영화들은 지속적으로 관객들을 만나 왔지만 국내 패션 디자이너의 인생을 기록한 작품은 <노라노>가 처음이기에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영화 <노라노>에는 1956년 대한민국 최초로 패션쇼를 개최하고, 파리의상조합에서 기성복 시스템을 결정하기 전인 1963년에 기성복을 시작하였으며, 1974년 국내 브랜드 최초로 미국 Macy’s 백화점 1층 전면에 입점하는 등 대한민국 패션사의 주요한 장면들을 만들어 낸 노라노의 업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성의 인권, 지위 등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전무했던 시절, 옷을 통해 여성들의 정체성을 확립시켰던 디자이너 노라노의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기록 또한 섬세하게 담겨 있다.
노라노 60주년 기념 전시회 ‘라비 앙 로즈 La Vie en Roase展’을 기획했던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은 “코코 샤넬, 소니아 니켈,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과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내 나라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 이제는 대한민국 패션사의 뿌리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순간들로만 남아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한 바 있다. 이러한 안타까움에 대한 답변처럼 60주년 기념 전시회 이후 노라노를 재조명하는 움직임들이 이어지고 있다. 2013년 ‘F/W 서울패션위크’에서 디자이너 노라노의 일대기를 담은 필름이 행사기간 내내 관람객들에게 공개되며, 10월 3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디자이너 노라노의 패션사를 회고하는 기획전시가 신문박물관에서 진행되는 등 대한민국 패션계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 <노라노>의 개봉은 그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함으로써 패션계에 새로운 흐름을 낳을 것으로 기대된다.
배우 조민수, ‘현대여성의 아이콘’ 된 사연은?
20 40 60 여성들이 극장에 모인 까닭은?
시대와 맞선 여성들의 연대를 도모하다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유신정권 등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패션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은 ‘노라노’라는 여성의 삶을 바라보는 영화 <노라노>의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여자 인생의 최대 실패라 일컬어졌던 이혼을 감행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등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과정을 충실히 견뎌낸 한 여성의 삶을 묵묵히 응원하고 있는 것. 나아가 노라노의 옷을 소비함으로써 당대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영화 구석구석에 배치하여, 오늘날에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주변의 시선에 맞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용기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영화의 주제에 공감하는 여성 관객들이 영화 <노라노>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후원회원들을 필두로 여성 민우회, 여성 재단, 아줌마 닷컴, 줌마네 등 여성단체 및 여성중심 커뮤니티 회원들이 개봉 전 영화를 미리 관람하고 극장개봉 후 재관람을 약속했다. “’제 2의 인생’을 준비하고자 했으나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다소 절망적인 상황에서 <노라노>를 만나게 되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고 간다”,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불안하고 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내 인생에, 노라노 선생님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도망가지 않을 수 있는 희망을 주셨다”는 관객들의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김기덕 감독의 18번째 영화 <피에타>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 조민수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라노> 메인 포스터 모델로 참여하여 영화에 대한 지지의사를 전했다. “’여성의 직업’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던 그 시절에, 자신의 길을 스스로 꾸려 나간 노라노 선생님의 삶에 감동을 받았다. 보다 많은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삶에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전한 조민수는 메인 포스터 속에서 시대와 맞서고 있는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 ‘현대여성의 아이콘’으로 분해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이처럼 여성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노라노>가 새로운 여성문화를 만들어 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ABOUT MOVIE ]
엄마, 아내, 딸이라는 역할을 벗고
‘나 다운 나’를 찾고자 하는 모든 여성들을 응원하다!
인생을 디자인하는 여자들의 영화
영화 <노라노>는 “나에게는 내 자신에 대한 의무가 있어요”라는 말과 함께 가출을 감행한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처럼 엄마, 아내, 딸이라는 역할을 벗고 ‘나 다운 나’를 찾고자 하는 모든 여성들을 응원하고자 한다. 여든의 나이에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속눈썹을 붙이는 노라노의 모습은 선뜻 그려보지 못 했던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며, 원치 않은 결혼과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이혼, 목표했던 삶의 방향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등 갖가지 시련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열정을 지켜 낸 노라노의 이야기는 앞으로 계속될 삶과 당당히 맞서게 하는 용기를 선사한다.
보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제 막 미래를 꾸리기 시작한 젊은 세대들도, 시간의 무게를 견뎌 온 중년 세대들도, 인생을 돌아보는 노년 세대들도, 모든 세대가 함께 공감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는 60년 동안 손에서 가위를 놓지 않았던 직업인 노라노에게 존경심을 표할 것이며, 누군가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명동 거리를 거닐었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전통적인 삶을 박차고 자신만의 인생을 꾸려 간 노라노의 삶에 감동을 받을지도 모른다. 각자의 관점에서 다양한 감동을 얻어갈 수 있는 영화가 <노라노>인 것! 엄마와 딸이, 할머니와 손녀가 극장을 가득 메우는 진풍경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패션은 당신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패션史를 새로 쓰다
<노라노>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를 재조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 패션역사를 보다 넓은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노라노가 최초로 기성복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소비문화의 주체로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했던 시대적 배경이 담겨 있으며, 미니스커트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윤복희’라는 스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사회의 부정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던 수많은 여성들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희 감독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대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여성들의 욕망을 포착해 낸다. 단지 섹시한 이미지가 아니라 ‘직업 여성’, ‘멋있고 당당한 여성’의 이미지를 노라노의 옷을 통해 표현해 냈던 것. “나는 옷을 통해 여성들의 생각을 바꾸고,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는 노라노의 철학이 당대 여성들에게는 위험한 상상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 새로운 도전의 계기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패션이라는 소재로부터 여성문화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노라노>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패션의 역사를 바라보는 FASHION 다큐멘터리이자, 주체적인 삶을 꾸리고자 하는 여성들의 열정을 묵묵히 응원하는 PASSION 다큐멘터리이다.
감각적인 편집, 다채로운 음악 사용, 효과적인 재연 장면의 활용 등
다큐멘터리의 트렌드를 담아내다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연상 시켰던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2012), 실제 경기만큼 진한 감동을 선사했던 스포츠 다큐멘터리 <굿바이 홈런> (2013), 제주 구석구석의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잊혀졌던 역사를 좇는 다큐멘터리 <비념> (2013) 등 다양한 형식, 다양한 장르,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들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다큐멘터리 작품들의 극장개봉이 점차 증가하면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노라노> 또한 기존의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쉽게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을 과감하게 접목시켰다. 실제 배우들이 노라노의 과거를 연기한 재연 장면을 사용한다거나, 대한뉴스, 고전영화들, 당대 사회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뉴스 스크랩 화면들을 다채로운 음악과 함께 짜맞추어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감각적인 편집과 세련된 구성이 영화적 재미 또한 선사하고 있는 것. 제 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의 첫 상영 당시, ‘재미있다’, ‘감각적이다’, ‘다큐멘터리라서 지루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라는 평이 나온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유행을 담아내는 패션이라는 소재를 다큐멘터리 작업의 트렌드를 반영한 세련된 연출로 담아낸 <노라노>는 10월 31일 개봉한다.
[ PRODUCTION NOTE ]
1. <노라노>의 사회문화적 배경
: 1950~70년대 ‘발칙한’ 여성탄생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나는 마치 길가다 강풍을 만나 치마가 활짝 부풀어 오른 계집애처럼
붕 떠오르고 싶은 갈망과 얼른 치마를 다둑 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전후 급작스레 일깨워진 여성 욕망과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치 사이에서 울렁이던 1950년대 여성의 근대 체험을 이와 같이 묘사한다. 1950년부터 본격화된 근대화 프로젝트는 예상치도 못한 ‘위험한 여성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전쟁통에 잃어버린 남편, 아들을 대신해 남성이 도맡아왔던 자리를 꿰차게 된 여성들이 이제 직장으로, 거리로, 땐스홀로 나서기 시작했다. 서구화된 근대 문물과 문화, 가치는 여성들을 울렁이게 만들었고, 전후 경제적 복구와 근대사회로의 도약을 제1의 과제로 삼고 여성 노동력을 요구했던 국가정책이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정당성을 제공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드러진 여성들의 약진 속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낀 남성들은 “웬만큼 똑똑치 못한 남성은 여인의 손에서 얻어먹고 살게 되었다”(「여원」, 1959)며 연일 울분을 토로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근대화 과정은 여성을 둘러싼 다양한 이미지와 가치들을 만들어내면서 새로운 ‘교양’ 있는 여성의 탄생을 요구했다. 아프레 걸, 자유부인, 유한 마담, 여대생, 미망인, 주부 등과 같은 여성 이미지 및 담론이 여성들을 가르고 구분하기 시작했다.
“교양이나 인격은 부수적인 조건이요 남성의 정열을 물질로써 표시할 수 있는 곳에 좀 더 매력을 느끼는”(「여성계」, 1957) 아프레 걸, “불량배와 작반하여 땐스홀 출입이 빈번”(「여원」, 1955)한 여대생, “자기희생을 저버리면서 허영과 의타에 의존한”(「여원」, 1968) 자유부인에 대한 탄식이 쏟아졌다. 반면 천박한 여성이 되지 않기 위해 갖추어야 할 ‘교양’이 강조되었고, 이제 여성은 교양 있는 현대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화장, 의복, 언어사용, 대화, 인사법, 호칭 등의 ‘에티켓’을 체화해야만 했다. 커피, 담배, 스타킹, 퍼머, 하이힐, 패션쇼, 양장, 쇼핑, 냉장고, TV 등으로 대표되는 모던한 상품과 이미지를 마시고 입고 사용하면서도 모성, 내조, 정숙, 현모양처와 같은 전근대적 가치를 수호할 수 있는 여성. 그것이 바로 당대가 요구한 여성이었다.
이처럼 1950년부터 본격화된 근대화 프로젝트는 여성들이 직장으로, 거리로, 땐스홀로 나서는 것을 ‘용인’해 주었지만 동시에 여성들이 맞이한 ‘자유’를 비난하고 통제하였다. 한편에서는 패션을 비롯한 대중문화가 여성을 새로운 소비주체로 호명하기 시작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와 가정의 ‘집사람’이 될 것을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 속에서 여성들은 갈등하고 타협하며 여성문화와 역사를 만들어왔다.
역사는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누리는 현재는 과거의 소소하지만 켜켜이 쌓인 작은 도전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여성들이 만끽했던 새로운 자유와 문화, 그에 대한 비난과 통제가 얽혀있던 1950~70년대 여성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잊혀진 역사를 구성해왔다. 다큐멘터리 <노라노>는 그 잊혀진 역사를, 살아있는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복원하고 발굴하며 다시 구성하고자 한다.
2. 잊혀진 여성문화의 재발견
: 84세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에게 듣는 1950~70년대 대중문화 이야기
지금은 별다른 의미 없이 단순한 ‘취향’이나 ‘스타일’로 용인되는 많은 것들에 커다란 용기와 도전이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5,60년대 여성들이 치마, 저고리를 벗고 양놈들의 되바라진 차림새라 비난받았던 ‘양장’을 걸쳤을 때가 그러했고, 남자들만의 옷이었던 여성답지 못한 ‘바지’를 입었을 때도 그러했으며, 허벅지를 드러내 사회를 경악시킨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을 때도 그러했다. 지금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여성을 옭아매고 있었던 전통과 기성세대, 사회에 대한 ‘저항’이자 ‘도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1950~1960년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여성들의 과거에도 현재를 만들어낸 도전과 저항이 존재한다. 전후 물밀듯이 밀려드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동경과 갈망, 그리고 가부장적인 전통과의 갈등 속에서 당대 여성들은 시대와 타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전하기도 하면서 변화를 만들어왔다. 격동의 시대, 암흑의 시대라 불리던 그 시대에 평범한 여성들이 만들어낸 ‘대중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우리는 이러한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적이고 대담한 도전을 제대로 들춰내고 이해하려 노력한 적이 없다. 따라서 다큐멘터리 <노라노>는 1950~1960년대 여성들의 일상과 문화를 당대 여성패션과 문화의 최고 상징이었던 패션디자이너 ‘노라노’를 매개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국 최초 패션쇼 개최, 최초 기성복 제작, 최초 미국백화점 입점 등의 화려한 성과를 자랑하는 노라노는 1950년대에서 1970년대 한국 패션계를 주름잡았던 당대 대표적인 패션 디자이너였다. 퍼스트레이디에서부터 고관 부인들, 연예인, 여교수, 고급 기생에 이르기까지 ‘최고’ 인물들이 노라노의 옷을 찾았다.
또한 노라노는 한국전쟁 이전 흥행했던 연극과 여성국극, 전후 미8군쇼, 영화, TV드라마 등 한국 대중문화의 흐름을 함께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노라노는 여성의 몸과 욕망을 기획하고 디자인한 패션 디자이너로서, 여배우의 코디네이터로서, 대중문화 기획자로서 여성 문화사를 만들어왔다. 전후 서구화와 전통의 복원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아리랑 드레스’에 담았고, 대중문화의 확장 속에서 소비주체로 등장한 신세대 여성들의 욕망을 ‘미니스커트’와 ‘판탈롱’으로 디자인했으며, “화장에 관심이 있고 요부다운 아내”(「여원」, 1958)에게 늘어진 메리야스를 대신 ‘홈드레스’를 선사했다.
노라노의 옷은 당대 여성들이 갖추어야 할 교양과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또한 비단 상류층 여성들뿐 아니라 멋내기에 눈을 뜬 다양한 여성들의 욕망의 대상이자 로망이었다. 그렇다면 5,60년대 여성들은 노라노의 옷을 통해, 노라노의 이름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무엇에 저항하고 싶었을까. 5,60년대를 기억하는 ‘노라노’와 그녀를 기억하는 노년 세대의 기억과 경험을 통해, 그 동안 ‘문화’로 명명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일상을 대중문화의 한 역사로 자리매김하고, 당대의 문화 생산의 주역으로서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을 다시 그려보고자 한다.
3. 신여성의 계급과 젠더에 대한 재해석
: 신여성 노라노를 통해 본 다르고도 같은 여성 이야기
일제시대, 한국전쟁, 4•19와 5•16, 군사정권과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한국 근현대사를 겪으며 여성의 몸을 기획하고 디자인해온 노라노의 삶은 한국 여성의 근대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군위안부로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17세에 일본 대위와 결혼, 해방과 함께 19세에 이혼, 미국으로 유학,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노라노는 부르주아 계급의 특권층으로서, 가부장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혼한 여성으로서, 몰락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성공적인 사회진출을 이뤄낸 여성으로서,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냈다.
또한 노라노는 한국 근현대의 ‘보통’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 고종황제의 영어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 경성방송국 국장인 아버지, 최초 아나운서 어머니 밑에서 차녀로 자란 노라노는 특권층의 삶을 누려왔다. 양장이 흔치 않던 시절 세라복을 입고 초등학교를 다녔고, 화장품을 챙겨 피난길에 나섰으며, 한국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했고, 일찍이 미국이라는 미래를 경험한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이었다. 때문에 ‘미래에서 온’ 노라노는 당대 상류층의 신여성들처럼 한국 근대문화를 선도하고 창조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계급성은 경제적 계급과 젠더적 계급 혹은 섹슈얼리티 계급간의 다층적인 만남과 갈등을 통해 형성된다. 노라노 역시 부르주아 계급의 규범적 삶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비규범적 삶을 택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여자 인생의 최대 실패라 낙인찍히는 이혼을 감행하고 미국행을 택하면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 노명자가 입센의 <인형의 집>의 ‘노라’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그녀는 국가나 아버지가 아닌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싶었다고 한다.
물론 이후 노라노에게는 결혼을 청하는 남자들도 꽤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마다 자신의 실수가 반복되지는 않을까, 혹은 힘들게 쌓아온 자신의 세계가 다시 가정 안으로 도태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노라노는 혼자이기를 택했지만, 이혼한 여자로서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패션계라는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세계에서,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만만한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노라노의 특별한 삶은 여성의 삶을 가로지르는 젠더와 계급의 갈등과 충돌을 보여준다. 그녀의 계급적 특권은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를 보호했고, 여성 욕망을 부추기는 새로운 가치와 문화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꿈을 꾸게 했다. 과연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노라노를 보호했던 계급적 특권이란 무엇이며, 그 특권을 쓸모 없게 만든 여성이라는 젠더적 계급은 무엇일까. 규범과 비규범을 넘나들며 살아온 노라노의 근대 경험은 또한 어떠 했을까. 노라노가 지녀왔던 위치들, 계급들을 통해 여성들의 상이한 근대 경험을 접하고자 한다
4. 노년세대를 위한, 세대간 소통을 위한 여성문화의 생산
: 여성이 주인공인 또 다른 ‘쎄시봉’ 열풍을 꿈꾼다
최근 불고 있는 ‘쎄시봉’ 열풍은 손주들의 재롱만이 유일한 낙이었던 노년세대들을 콘서트 장으로 불러모았고, 자신들의 청춘을 흥얼거리게 만들었으며, 그 청춘에 대한 수다를 젊은 세대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를 넘어 6,70년대 대중문화를 ‘발견’하고, 이를 젊은 세대와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노라노> 역시 5,60년대 청춘을 보낸 여성들이 함께 즐기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자 한다. 노년세대가 자신들의 문화적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한국 문화시장에서 역사 속 문화 주체였던 다양한 여성들의 기억을 자극하고, 그 기억을 젊은 여성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또한 저물어가는 한 세대의 도전과 실험을, 앞선 세대들이 들려줄 수 있는 삶의 교훈을 영화를 통해 남기고자 한다. 주부, 어머니, 그리고 식모나 여공으로 불렸던 여성 노동자들이 당대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타협하고 갈등하며 도전했던 일상 이야기를 통해, 현재 우리 젊은 여성들이 살고 있는 지금을 다시금 이야기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여성의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
[ SPECIAL TIP ]
한국의 코코 샤넬, 노라노
1928년 경성에서 태어나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44년 일본군 위안부로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결혼을 택했으나 자신이 꿈꾸었던 삶과는 다른 방향이라고 판단, 이혼을 택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자신의 권리를 찾아 남편에게 이혼을 선고하고 집을 뛰쳐나간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노명자’에서 ‘노라노’로의 삶을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패션쇼를 개최, 한국 최초로 기성복 도입, 국내 브랜드 최초로 미국 Macy’s 백화점 입점 등 한국 패션사의 주요한 순간들을 만들어 냈으며, 윤복희의 미니 스커트, 펄 시스터즈의 판탈롱, 엄앵란의 햅번 스타일 등 여성들이 욕망하는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2012년에는 60주년 기념 전시회 ‘라비 앙 로즈 La Vie en Rose 展’을 통해 반세기를 거쳐 온 패션 인생을 회고 하였으며, 만 85세인 지금도 변함없이 가위질을 하고 있다.
★★★ 노라노 반세기 패션사 ★★★
1928 - 경성 출생
1944 - 17세, 일본군위안부로 징집되는 것을 피해 일본 대위와 결혼
1946 - 19세, 이혼
1947 - 한국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 비행기 승객이 되어 미국유학
1949 - FRANK WAGGON TECHNICAL COLLEGE 졸업 (U.S.A)
1952 - ‘노라노의 집’ 개업 (서울명동)
1954 - 최은희를 시작으로 최지희, 김지미, 문정숙, 문희 등
당대 최고 여배우들의 영화 의상을 담당
1956 - 국내 최초의 패션쇼 개최 (BANDO HOTEL 서울)
1959 - 미스코리아 오현주의 샤프롱으로 한국 최초로 미스유니버스대회 출전
1962 - HAWAII HONOLULU ALAMONAD BRANCH STORE 오픈
1963 - 국내최초 기성복 패션쇼 개최 (현, 미도파 백화점)
1966 - TV의 대중화와 함께 1966년 전향이를 시작으로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윤여정, 윤소정, 윤복희, 펄시스터즈 등 TV 스타들의 의상 협찬
1974 - 한국 브랜드 최초로 미국 Macy’s 백화점에 입점
1977 - 주식회사 예림양행 설립 (충무로)
1978 - NEW YORK 7TH Ave. ‘NORA NOH INC’ 현지법인설립
1990 - NORA NOH HONG KONG 설립
1990 - NOTA NOH JAPAN 설립
2007 - [노라노, 열정을 디자인하다] 도서 출간
2010 - [한국패션대상]에서 ‘대통령상’ 수상
2012 - 노라노 60주년 기념 전시회 ‘라비앙로즈 La Vie en Rose展 ’ 개최
2013 - 다큐멘터리 <노라노> 개봉
★★★ Thanks to 노라노 ★★★
“노라노 선생님은 옷을 통해 사회의 고정관념을 확 뒤집어버렸다”
가수 윤복희
“감독은 연기자를 연출하지만 노라노 선생님은 전체 의상을 연출하셨다.
대중문화의 기수였던 것”
배우 엄앵란
“나도 노여사님도, 열과 열이 부딪치는 그런 느낌으로 일을 했다.
그 정열을 따라갈 사람은 없을 거다”
배우 최은희
“대본이 나오면 모든 배우들이 바로 노라노 선생님을 찾아갔다.
‘영화 의상의 사령탑’이었던 것”
배우 최지희
“코코 샤넬, 소니아 니켈,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과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내 나라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
이제는 대한민국 패션史의 뿌리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스타일리스트 서은영 (노라노 60주년 기념 전시회 ‘라비앙 로즈 La Vie en Rose展 ’ 기획)
“내가 염색한 미군 군복 바지를 입고 다니던 전후의 그 극빈한 시절에도
어딘가에 패션계가 있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소설가 박완서
“이럴 때의 감동이라는 말만은 꼭 한자로 쓰고 싶다.
感動-느낌의 감과 움직임의 동이라는 뜻이다.
느낌이 있어야 움직이고 움직임이 있어야 느낀다.
그것이 패션 60년의 노라 노의 삶이며 그 행동의 원리이다.
한 때 많은 한국 여성이 입센의 드라마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노라를 동경하여
울타리 밖으로 나갔지만 대개는 다 가혹한 세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아니다.
막히면 통한다는 의지, 결과 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불타는 한 여성의 모험은
끝내 불모의 이 땅에 디자인 나라를 만들어 냈다.”
문학 평론가 이어령
“패션 디자이너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정답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
제일모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구호 전무
“그 옛날에 만들어진 옷임에도 불구하고 노라노 선생님의 옷은 매우 모던하다.
지금 입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디자인에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다”
디자이너 스티브J & 요니P
“경이롭다고 느낀 부분은 경계라는 부분들을 규정짓지 않고 넘나드셨다는 것.
최초로 기성복 패션쇼를 했다는 것도
그 당시에는 굉장히 용기를 내야 하는 행동이지 않았을까”
디자이너 최철용
“패션이라는 컨셉 자체가 없었던 시절에
옷을 단순히 의복으로만 보지 않고
패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바라보셨던 것이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이다”
디자이너 홍혜진
“노라노 선생님이 없었다면,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지금처럼 해외에서 활약할 수 있었을까”
디자이너 강동준
“우리나라에 패션이라는 단어를 던져준 분이라고 생각하니 무척 놀랍다”
디자이너 이승희
“‘트렌드나 유행은 금방 지나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그 말 처럼, 대중들에게 스타일에 대한 스타일링을 접목하고
표현해주셨던 부분이 디자이너로서 존경스럽다”
디자이너 이석태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 때 ‘노라노’라는 폰트자체만 봐도 가슴이 설렜다.
노라노 선생님이 ‘패션의 어머니’시고 ‘뿌리와 혈통’이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
노라노 선생님이 있기에 일제시대부터 패션이라는 것이 이어져 왔고,
우리는 그 공기를 마시면서 패션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 박윤수
[ HOT ISSUE ]
‘앙드레 김’ 이전에 ‘노라노’가 있었다!
대한민국 패션계, 뿌리를 찾기 시작하다
10월 31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노라노>는 국내최초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의 반세기 패션사를 담은 작품. 세계 명품 브랜드 ‘샤넬’이 탄생하기까지의 일대기를 담은 <코코 샤넬> (2009), 20세기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화려한 성공에서부터 죽음까지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 (2011), 스타일 아이콘 샤넬과 20세기 천재 음악가 스트라빈스키의 로맨스를 담은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2011) 등 해외 패션 거장들의 삶을 담은 영화들은 지속적으로 관객들을 만나 왔지만 국내 패션 디자이너의 인생을 기록한 작품은 <노라노>가 처음이기에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영화 <노라노>에는 1956년 대한민국 최초로 패션쇼를 개최하고, 파리의상조합에서 기성복 시스템을 결정하기 전인 1963년에 기성복을 시작하였으며, 1974년 국내 브랜드 최초로 미국 Macy’s 백화점 1층 전면에 입점하는 등 대한민국 패션사의 주요한 장면들을 만들어 낸 노라노의 업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성의 인권, 지위 등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전무했던 시절, 옷을 통해 여성들의 정체성을 확립시켰던 디자이너 노라노의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기록 또한 섬세하게 담겨 있다.
노라노 60주년 기념 전시회 ‘라비 앙 로즈 La Vie en Roase展’을 기획했던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은 “코코 샤넬, 소니아 니켈,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과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내 나라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 이제는 대한민국 패션사의 뿌리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순간들로만 남아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한 바 있다. 이러한 안타까움에 대한 답변처럼 60주년 기념 전시회 이후 노라노를 재조명하는 움직임들이 이어지고 있다. 2013년 ‘F/W 서울패션위크’에서 디자이너 노라노의 일대기를 담은 필름이 행사기간 내내 관람객들에게 공개되며, 10월 3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디자이너 노라노의 패션사를 회고하는 기획전시가 신문박물관에서 진행되는 등 대한민국 패션계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 <노라노>의 개봉은 그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함으로써 패션계에 새로운 흐름을 낳을 것으로 기대된다.
배우 조민수, ‘현대여성의 아이콘’ 된 사연은?
20 40 60 여성들이 극장에 모인 까닭은?
시대와 맞선 여성들의 연대를 도모하다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유신정권 등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패션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은 ‘노라노’라는 여성의 삶을 바라보는 영화 <노라노>의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여자 인생의 최대 실패라 일컬어졌던 이혼을 감행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등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과정을 충실히 견뎌낸 한 여성의 삶을 묵묵히 응원하고 있는 것. 나아가 노라노의 옷을 소비함으로써 당대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영화 구석구석에 배치하여, 오늘날에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주변의 시선에 맞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용기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영화의 주제에 공감하는 여성 관객들이 영화 <노라노>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후원회원들을 필두로 여성 민우회, 여성 재단, 아줌마 닷컴, 줌마네 등 여성단체 및 여성중심 커뮤니티 회원들이 개봉 전 영화를 미리 관람하고 극장개봉 후 재관람을 약속했다. “’제 2의 인생’을 준비하고자 했으나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다소 절망적인 상황에서 <노라노>를 만나게 되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고 간다”,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불안하고 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내 인생에, 노라노 선생님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도망가지 않을 수 있는 희망을 주셨다”는 관객들의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김기덕 감독의 18번째 영화 <피에타>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 조민수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라노> 메인 포스터 모델로 참여하여 영화에 대한 지지의사를 전했다. “’여성의 직업’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던 그 시절에, 자신의 길을 스스로 꾸려 나간 노라노 선생님의 삶에 감동을 받았다. 보다 많은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삶에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전한 조민수는 메인 포스터 속에서 시대와 맞서고 있는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 ‘현대여성의 아이콘’으로 분해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이처럼 여성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노라노>가 새로운 여성문화를 만들어 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ABOUT MOVIE ]
엄마, 아내, 딸이라는 역할을 벗고
‘나 다운 나’를 찾고자 하는 모든 여성들을 응원하다!
인생을 디자인하는 여자들의 영화
영화 <노라노>는 “나에게는 내 자신에 대한 의무가 있어요”라는 말과 함께 가출을 감행한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처럼 엄마, 아내, 딸이라는 역할을 벗고 ‘나 다운 나’를 찾고자 하는 모든 여성들을 응원하고자 한다. 여든의 나이에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속눈썹을 붙이는 노라노의 모습은 선뜻 그려보지 못 했던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며, 원치 않은 결혼과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이혼, 목표했던 삶의 방향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등 갖가지 시련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열정을 지켜 낸 노라노의 이야기는 앞으로 계속될 삶과 당당히 맞서게 하는 용기를 선사한다.
보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제 막 미래를 꾸리기 시작한 젊은 세대들도, 시간의 무게를 견뎌 온 중년 세대들도, 인생을 돌아보는 노년 세대들도, 모든 세대가 함께 공감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는 60년 동안 손에서 가위를 놓지 않았던 직업인 노라노에게 존경심을 표할 것이며, 누군가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명동 거리를 거닐었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전통적인 삶을 박차고 자신만의 인생을 꾸려 간 노라노의 삶에 감동을 받을지도 모른다. 각자의 관점에서 다양한 감동을 얻어갈 수 있는 영화가 <노라노>인 것! 엄마와 딸이, 할머니와 손녀가 극장을 가득 메우는 진풍경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패션은 당신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패션史를 새로 쓰다
<노라노>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를 재조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 패션역사를 보다 넓은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노라노가 최초로 기성복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소비문화의 주체로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했던 시대적 배경이 담겨 있으며, 미니스커트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윤복희’라는 스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사회의 부정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던 수많은 여성들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희 감독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대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여성들의 욕망을 포착해 낸다. 단지 섹시한 이미지가 아니라 ‘직업 여성’, ‘멋있고 당당한 여성’의 이미지를 노라노의 옷을 통해 표현해 냈던 것. “나는 옷을 통해 여성들의 생각을 바꾸고,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는 노라노의 철학이 당대 여성들에게는 위험한 상상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 새로운 도전의 계기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패션이라는 소재로부터 여성문화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노라노>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패션의 역사를 바라보는 FASHION 다큐멘터리이자, 주체적인 삶을 꾸리고자 하는 여성들의 열정을 묵묵히 응원하는 PASSION 다큐멘터리이다.
감각적인 편집, 다채로운 음악 사용, 효과적인 재연 장면의 활용 등
다큐멘터리의 트렌드를 담아내다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연상 시켰던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2012), 실제 경기만큼 진한 감동을 선사했던 스포츠 다큐멘터리 <굿바이 홈런> (2013), 제주 구석구석의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잊혀졌던 역사를 좇는 다큐멘터리 <비념> (2013) 등 다양한 형식, 다양한 장르,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들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다큐멘터리 작품들의 극장개봉이 점차 증가하면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노라노> 또한 기존의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쉽게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을 과감하게 접목시켰다. 실제 배우들이 노라노의 과거를 연기한 재연 장면을 사용한다거나, 대한뉴스, 고전영화들, 당대 사회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뉴스 스크랩 화면들을 다채로운 음악과 함께 짜맞추어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감각적인 편집과 세련된 구성이 영화적 재미 또한 선사하고 있는 것. 제 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의 첫 상영 당시, ‘재미있다’, ‘감각적이다’, ‘다큐멘터리라서 지루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라는 평이 나온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유행을 담아내는 패션이라는 소재를 다큐멘터리 작업의 트렌드를 반영한 세련된 연출로 담아낸 <노라노>는 10월 31일 개봉한다.
[ PRODUCTION NOTE ]
1. <노라노>의 사회문화적 배경
: 1950~70년대 ‘발칙한’ 여성탄생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나는 마치 길가다 강풍을 만나 치마가 활짝 부풀어 오른 계집애처럼
붕 떠오르고 싶은 갈망과 얼른 치마를 다둑 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전후 급작스레 일깨워진 여성 욕망과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치 사이에서 울렁이던 1950년대 여성의 근대 체험을 이와 같이 묘사한다. 1950년부터 본격화된 근대화 프로젝트는 예상치도 못한 ‘위험한 여성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전쟁통에 잃어버린 남편, 아들을 대신해 남성이 도맡아왔던 자리를 꿰차게 된 여성들이 이제 직장으로, 거리로, 땐스홀로 나서기 시작했다. 서구화된 근대 문물과 문화, 가치는 여성들을 울렁이게 만들었고, 전후 경제적 복구와 근대사회로의 도약을 제1의 과제로 삼고 여성 노동력을 요구했던 국가정책이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정당성을 제공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드러진 여성들의 약진 속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낀 남성들은 “웬만큼 똑똑치 못한 남성은 여인의 손에서 얻어먹고 살게 되었다”(「여원」, 1959)며 연일 울분을 토로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근대화 과정은 여성을 둘러싼 다양한 이미지와 가치들을 만들어내면서 새로운 ‘교양’ 있는 여성의 탄생을 요구했다. 아프레 걸, 자유부인, 유한 마담, 여대생, 미망인, 주부 등과 같은 여성 이미지 및 담론이 여성들을 가르고 구분하기 시작했다.
“교양이나 인격은 부수적인 조건이요 남성의 정열을 물질로써 표시할 수 있는 곳에 좀 더 매력을 느끼는”(「여성계」, 1957) 아프레 걸, “불량배와 작반하여 땐스홀 출입이 빈번”(「여원」, 1955)한 여대생, “자기희생을 저버리면서 허영과 의타에 의존한”(「여원」, 1968) 자유부인에 대한 탄식이 쏟아졌다. 반면 천박한 여성이 되지 않기 위해 갖추어야 할 ‘교양’이 강조되었고, 이제 여성은 교양 있는 현대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화장, 의복, 언어사용, 대화, 인사법, 호칭 등의 ‘에티켓’을 체화해야만 했다. 커피, 담배, 스타킹, 퍼머, 하이힐, 패션쇼, 양장, 쇼핑, 냉장고, TV 등으로 대표되는 모던한 상품과 이미지를 마시고 입고 사용하면서도 모성, 내조, 정숙, 현모양처와 같은 전근대적 가치를 수호할 수 있는 여성. 그것이 바로 당대가 요구한 여성이었다.
이처럼 1950년부터 본격화된 근대화 프로젝트는 여성들이 직장으로, 거리로, 땐스홀로 나서는 것을 ‘용인’해 주었지만 동시에 여성들이 맞이한 ‘자유’를 비난하고 통제하였다. 한편에서는 패션을 비롯한 대중문화가 여성을 새로운 소비주체로 호명하기 시작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와 가정의 ‘집사람’이 될 것을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 속에서 여성들은 갈등하고 타협하며 여성문화와 역사를 만들어왔다.
역사는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누리는 현재는 과거의 소소하지만 켜켜이 쌓인 작은 도전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여성들이 만끽했던 새로운 자유와 문화, 그에 대한 비난과 통제가 얽혀있던 1950~70년대 여성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잊혀진 역사를 구성해왔다. 다큐멘터리 <노라노>는 그 잊혀진 역사를, 살아있는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복원하고 발굴하며 다시 구성하고자 한다.
2. 잊혀진 여성문화의 재발견
: 84세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에게 듣는 1950~70년대 대중문화 이야기
지금은 별다른 의미 없이 단순한 ‘취향’이나 ‘스타일’로 용인되는 많은 것들에 커다란 용기와 도전이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5,60년대 여성들이 치마, 저고리를 벗고 양놈들의 되바라진 차림새라 비난받았던 ‘양장’을 걸쳤을 때가 그러했고, 남자들만의 옷이었던 여성답지 못한 ‘바지’를 입었을 때도 그러했으며, 허벅지를 드러내 사회를 경악시킨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을 때도 그러했다. 지금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여성을 옭아매고 있었던 전통과 기성세대, 사회에 대한 ‘저항’이자 ‘도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1950~1960년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여성들의 과거에도 현재를 만들어낸 도전과 저항이 존재한다. 전후 물밀듯이 밀려드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동경과 갈망, 그리고 가부장적인 전통과의 갈등 속에서 당대 여성들은 시대와 타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전하기도 하면서 변화를 만들어왔다. 격동의 시대, 암흑의 시대라 불리던 그 시대에 평범한 여성들이 만들어낸 ‘대중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우리는 이러한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적이고 대담한 도전을 제대로 들춰내고 이해하려 노력한 적이 없다. 따라서 다큐멘터리 <노라노>는 1950~1960년대 여성들의 일상과 문화를 당대 여성패션과 문화의 최고 상징이었던 패션디자이너 ‘노라노’를 매개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국 최초 패션쇼 개최, 최초 기성복 제작, 최초 미국백화점 입점 등의 화려한 성과를 자랑하는 노라노는 1950년대에서 1970년대 한국 패션계를 주름잡았던 당대 대표적인 패션 디자이너였다. 퍼스트레이디에서부터 고관 부인들, 연예인, 여교수, 고급 기생에 이르기까지 ‘최고’ 인물들이 노라노의 옷을 찾았다.
또한 노라노는 한국전쟁 이전 흥행했던 연극과 여성국극, 전후 미8군쇼, 영화, TV드라마 등 한국 대중문화의 흐름을 함께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노라노는 여성의 몸과 욕망을 기획하고 디자인한 패션 디자이너로서, 여배우의 코디네이터로서, 대중문화 기획자로서 여성 문화사를 만들어왔다. 전후 서구화와 전통의 복원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아리랑 드레스’에 담았고, 대중문화의 확장 속에서 소비주체로 등장한 신세대 여성들의 욕망을 ‘미니스커트’와 ‘판탈롱’으로 디자인했으며, “화장에 관심이 있고 요부다운 아내”(「여원」, 1958)에게 늘어진 메리야스를 대신 ‘홈드레스’를 선사했다.
노라노의 옷은 당대 여성들이 갖추어야 할 교양과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또한 비단 상류층 여성들뿐 아니라 멋내기에 눈을 뜬 다양한 여성들의 욕망의 대상이자 로망이었다. 그렇다면 5,60년대 여성들은 노라노의 옷을 통해, 노라노의 이름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무엇에 저항하고 싶었을까. 5,60년대를 기억하는 ‘노라노’와 그녀를 기억하는 노년 세대의 기억과 경험을 통해, 그 동안 ‘문화’로 명명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일상을 대중문화의 한 역사로 자리매김하고, 당대의 문화 생산의 주역으로서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을 다시 그려보고자 한다.
3. 신여성의 계급과 젠더에 대한 재해석
: 신여성 노라노를 통해 본 다르고도 같은 여성 이야기
일제시대, 한국전쟁, 4•19와 5•16, 군사정권과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한국 근현대사를 겪으며 여성의 몸을 기획하고 디자인해온 노라노의 삶은 한국 여성의 근대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군위안부로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17세에 일본 대위와 결혼, 해방과 함께 19세에 이혼, 미국으로 유학,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노라노는 부르주아 계급의 특권층으로서, 가부장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혼한 여성으로서, 몰락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성공적인 사회진출을 이뤄낸 여성으로서,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냈다.
또한 노라노는 한국 근현대의 ‘보통’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 고종황제의 영어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 경성방송국 국장인 아버지, 최초 아나운서 어머니 밑에서 차녀로 자란 노라노는 특권층의 삶을 누려왔다. 양장이 흔치 않던 시절 세라복을 입고 초등학교를 다녔고, 화장품을 챙겨 피난길에 나섰으며, 한국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했고, 일찍이 미국이라는 미래를 경험한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이었다. 때문에 ‘미래에서 온’ 노라노는 당대 상류층의 신여성들처럼 한국 근대문화를 선도하고 창조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계급성은 경제적 계급과 젠더적 계급 혹은 섹슈얼리티 계급간의 다층적인 만남과 갈등을 통해 형성된다. 노라노 역시 부르주아 계급의 규범적 삶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비규범적 삶을 택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여자 인생의 최대 실패라 낙인찍히는 이혼을 감행하고 미국행을 택하면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 노명자가 입센의 <인형의 집>의 ‘노라’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그녀는 국가나 아버지가 아닌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싶었다고 한다.
물론 이후 노라노에게는 결혼을 청하는 남자들도 꽤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마다 자신의 실수가 반복되지는 않을까, 혹은 힘들게 쌓아온 자신의 세계가 다시 가정 안으로 도태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노라노는 혼자이기를 택했지만, 이혼한 여자로서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패션계라는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세계에서,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만만한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노라노의 특별한 삶은 여성의 삶을 가로지르는 젠더와 계급의 갈등과 충돌을 보여준다. 그녀의 계급적 특권은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를 보호했고, 여성 욕망을 부추기는 새로운 가치와 문화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꿈을 꾸게 했다. 과연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노라노를 보호했던 계급적 특권이란 무엇이며, 그 특권을 쓸모 없게 만든 여성이라는 젠더적 계급은 무엇일까. 규범과 비규범을 넘나들며 살아온 노라노의 근대 경험은 또한 어떠 했을까. 노라노가 지녀왔던 위치들, 계급들을 통해 여성들의 상이한 근대 경험을 접하고자 한다
4. 노년세대를 위한, 세대간 소통을 위한 여성문화의 생산
: 여성이 주인공인 또 다른 ‘쎄시봉’ 열풍을 꿈꾼다
최근 불고 있는 ‘쎄시봉’ 열풍은 손주들의 재롱만이 유일한 낙이었던 노년세대들을 콘서트 장으로 불러모았고, 자신들의 청춘을 흥얼거리게 만들었으며, 그 청춘에 대한 수다를 젊은 세대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를 넘어 6,70년대 대중문화를 ‘발견’하고, 이를 젊은 세대와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노라노> 역시 5,60년대 청춘을 보낸 여성들이 함께 즐기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자 한다. 노년세대가 자신들의 문화적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한국 문화시장에서 역사 속 문화 주체였던 다양한 여성들의 기억을 자극하고, 그 기억을 젊은 여성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또한 저물어가는 한 세대의 도전과 실험을, 앞선 세대들이 들려줄 수 있는 삶의 교훈을 영화를 통해 남기고자 한다. 주부, 어머니, 그리고 식모나 여공으로 불렸던 여성 노동자들이 당대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타협하고 갈등하며 도전했던 일상 이야기를 통해, 현재 우리 젊은 여성들이 살고 있는 지금을 다시금 이야기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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