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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낙오자는 죽인다체포되면 자폭하라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지옥훈련… 31인의 살인병기 ‘실미도부대’ 탄생
“주석궁 침투, 김일성 목을 따 오는 것이 너희의 임무다!”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사회 어느 곳에서도 인간대접 받을 수 없었던 강인찬(설경구 분) 역시 어두운 과거와 함께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살인미수로 수감된다. 그런 그 앞에 한 군인이 접근, ‘나라를 위해 칼을 잡을 수 있겠냐’는 엉뚱한 제안을 던지곤 그저 살인미수일 뿐인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 누군가에게 이끌려 사형장으로 향하던 인찬,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인천 외딴 부둣가, 그곳엔 인찬 말고도 상필(정재영 분), 찬석(강성진 분), 원희(임원희 분), 근재(강신일 분) 등 시꺼먼 사내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그렇게 1968년 대한민국 서부 외딴 섬 ‘실미도’에 기관원에 의해 강제차출된 31명이 모인다.
영문 모르고 머리를 깎고 군인이 된 31명의 훈련병들, 그들에게 나타난 예의 그 묘령의 군인은 바로 김재현 준위(안성기 분),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 목을 따 오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는 한 마디를 시작으로 냉철한 조중사(허준호 분)의 인솔하에 31명 훈련병에 대한 혹독한 지옥훈련이 시작된다.
‘684 주석궁폭파부대’라 불리는 계급도 소속도 없는 훈련병과 그들의 감시와 훈련을 맡은 기간병들... “낙오자는 죽인다, 체포되면 자폭하라!”는 구호하에 실미도엔 인간은 없고 ‘김일성 모가지 따기’라는 분명한 목적만이 존재해간다...
1971년 8월 23일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인천시내버스를 타고 나타난 군인들이 군경합동진압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폭한 사건이 발생한다. 처음 당국은 '무장공비'라고 했다가 다음날 '군 특수범들의 난동사건'으로 정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부가 실미도에 만든 '북파특수부대'였다. 정부는 왜 그들을 거듭 부정했을까? 왜 그들은 목숨 걸고 탈출해 집단 자폭했을까? 그 진실찾기를 향한 국민적 염원이 2003년 스크린에서 구현된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면서도 역사 속에서 지워져야 했던 '실미도 사건'. 알아서 괴로웠고 '설마...'하며 상상치도 못했던 그 숨겨진 이야기가 드디어 공개된다. 한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실미도 684부대'를 소재로 한 '실미도 프로젝트'는 근 10여년동안 '영화계의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것이었다. 32년을 기다려 온 진실, 그 목격자이자 희생자였던 684부대 31인의 훈련병들이 겪은 3년간의 극비실화를 쫓는 영화 <실미도>. 2003년 12월, 거부할 수 없는 31명의 드라마틱한 운명과 드디어 조우한다.
한국영화 흥행의 마이다스 강우석 감독과 <박하사탕><오아시스>로 최고의 연기력을 선보인 설경구가 <공공의 적> 이후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췄다. 그들이 이미 보여준 <공공의 적>에서의 탄탄한 호흡은 영화 <실미도>에 대한 기대를 최고조에 달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국민배우 안성기와 허준호, 정재영, 강신일, 강성진, 임원희 등 이들만으로도 한국영화 5~6편은 찍을 수 있다는 내로라 할 주연급 배우들이 총출동, 한국영화 최정예부대의 비범한 파워를 보여준다.
'실미도사건'은 무엇인가?
1971년 8월 23일 이른바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명명된 그 날의 사건에 대해 언론은 그들이 정말 '북파부대'라면 건국 이래 최대의 파란을 몰고 올 사건이었기에 취재에 열을 올렸으나 어느 매체도 성공할 수 없었다. 사건 발생 3일만에 정래혁 국방장관, 김두만 공군참모총장 등 정부와 군 관계자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고 살아남은 4명의 훈련병들도 바로 사형되었다. 그렇게 '실미도 사건'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듯 했으나 '국민의 정부' 이후 HID, AIU 등 국군 산하 첩보부대들의 존재와 인권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실미도사건' 에 대한 재조명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부대의 공식명칭은 '오류동 정보부대'로 불리던 공군 제 7069부대 소속 2325전대 209파견대.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앞까지 침투했다 무산된 '1.21 김신조 사건'에 놀란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가 계획한 보복조치로 창설되었다. 사형수, 무기수, 일반 제소자들이 포함된 사회 밑바닥 계층을 포섭, 작전성공 시 모든 형벌 취소 및 전과기록 말소 등 정부로부터 새 삶을 보장 받는 조건이었다. 1968년 4월에 만들어져서 '684부대'로 불렸던 이 부대는 김신조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됐으나 훈련도중 사고, 탈출, 처형 등으로 7명 사망, 결국 24명이 최후까지 살아 남는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북파되어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 목을 따오는 것'이었다.
실미도에 훈련은 없었다. 뛰고 또 뛰는 훈련병들 뒤엔 언제나 실탄을 장전한 기간병들이 있었던 것. 그들은 인민군 말투에 인민군가, 인민군 제식훈련 등 철저하게 인민군식 훈련을 받았다. 처음엔 오합지졸이었던 훈련병들은 발꿈치로 날아드는 실제사격과 단체구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지옥훈련을 통해 단 3개월만에 북파 가능한 인간병기가 되었다. 부대가 창설된 지 4개월만에 첫번째 실전명령이 떨어져 바닷길로 북에 침투를 시도하지만 상부의 저지로 중도무산된다. 이후 3년 4개월간 '출정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의 긴긴 기다림은 시작된다.
그 사이 섬 밖 육지의 상황은 처음 실미도부대를 창설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국제 데땅트와 함께 남북 화해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고 중정부장이 교체되는 등 급격한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덧 '구 시대의 유물' 이자 '유령부대' 가 되어 버린 실미도 684부대, 결국 그들을 제거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실미도훈련병들에게 일반사병들이었던 담당 기간병들은 속수무책이었고, 단 십여분만에 실미도를 접수한 훈련병들은 인천으로 상륙, 송도외곽에서 버스를 탈취, 서울로 향한다. 전군 비상경계령이 발동된 가운데 이들은 진압군과 교전 끝에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전원 자폭이라는 최후를 선택한다.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신속히 이 사건을 종결지었다.
왜 함께 청와대로 향했는가? 왜 전원자폭 했을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당시 훈련병들이 탈취한 버스에는 민간인 승객들이 타고 있었고 이들은 묘한 증언을 해 왔다. 훈련병들이 청와대로 가자고 했다는 것, 인질인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분명 버스 안에서 훈련병들이 먼저 총을 쏘진 않았다는 것. 이는 반대로 인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은 사격을 가했다는 얘기다. 그들은 왜 함께 청와대로 가려고 했을까? 왜 함께 전원 자폭의 최후를 선택했는가? 북파가능한 인간병기들이 뿔뿔이 흩어져 개별행동을 했다면 살아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무언가 '목숨걸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32년간 숨겨져 온 진실... 이제 말할 수 있게 된 지금, 그러나 그들은 사라지고 없다.
실미도 사건 일지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 24명의 훈련병 탈출 행동 개시
6시 15분 실미도-공군부대간 통신두절. 24명의 기간병 중 6명만이 생존. 교육대장 김순응 준위 외 12명 사살, 6명 익사. 총 18명 기간병 희생.
낮 12시 20분 탈출 훈련병 24인 인천 독배부리 해안 상륙
12시 53분 첫번째 버스탈취, 서울로 향하다, 인천 송도역 삼거리, 대기중이던 육군 24명과 총격전 2명 중상
13시 10분 1차교전 - 인천 옥련고개
13시 20분 두번째 버스탈취, 인천 주안사거리 - 간석동고개
13시 30분 인천 소사 삼거리 경찰관 사살
13시 38분 인천 신양촌 검문소 경찰관 사살
14시 15분 서울 진입,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버스운전사 탈출
14시 25분 마지막 교전,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
"확실히 안에서 먼저 쏘진 않았다. 밖에서 먼저 쐈다" - 사건당시 버스승객 증언
일부 수류탄 자폭, 4명 생존
8월 25일 정래혁 국방장관 경질
1972년 3월 10일 오전 10시경, 4명의 생존자 사형 집행
1972년 7월 4일 남북 7.4 공동성명 합의, 평화통일 협약, 남북 무장도발 금지 조약 체결
강우석 VS 설경구, 최강콤비와 국내 초일류 제작진
<실미도>라는 이름하에 또 하나의 최정예특수부대로 거듭나다!
한국 최고의 흥행감독 강우석과 대한민국 최고 연기파배우 설경구가 <공공의적> 이후 다시한 번 호흡을 맞췄다. 한국영화 흥행의 미다스 강우석 감독과 자타가 공인하는 설경구의 폭넓은 연기력의 만남, 그리고 여기에 <접속><공동경비구역JSA><공공의적> 등의 국내최고의 실력을 소유한 김성복 촬영감독, <투캅스>부터 <공공의적>까지 강우석 감독과 호흡을 맞춰 온 신학성 조명감독 등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실력파들이 합세해 실미도부대 못지않은 또 하나의 '최정예특수부대'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극비프로젝트를 완수해 냈다.
한국영화사상 최장거리 로케이션! 최고의 셋트 제작비!
'실미도 부대' '대방동 교전지' 등 그 파국의 시간을 완벽히 재현하라!
2003년 최고의 화제작, <실미도>는 강원도-부산-인천-실미도-몰타-뉴질랜드-제주도-부안-파주에 이르는 7개월간의 최장거리 로케이션을 감행해야 했다. 최고의 수중 침투장면을 위해 '지중해 몰타 MFS 스튜디오' 로케이션과 겨울훈련 장면을 위한 '뉴질랜드' 로케이션에만 각각 7억원과 5억여원이 소요된 엄청난 작업이었다. 또한 부산 법정세트, 전라북도 부안의 대방동 세트, 실미도 훈련장 세트 등 <실미도>세트는 철저한 고증과 총 30여억원의 대규모 제작비가 집중되기도 했다. 이는 31명의 전사와 함께 역사 속에 묻혀간 그 때 그 시간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제작진의 굳은 의지에 의해 필수불가결한 규모였다.
세계최대의 CH-47D 시누크 헬기 동원, <스피드>의 특수제작버스 2대 직접 제작
실미도까지 배를 통해 운반된 촬영장비들은 실미도의 산 위까지 헬기에 의해 옮겨져야 했는데 이때 사용된 것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CH-47D 시누크 헬기 일명, '라이트테일'이었다. '1회수송에만 7천만원' 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실제 실미도 섬 중앙 산꼭대기에 크레인 2대와 발전기를 옮기는 이 힘든 작업은 국내영화 제작사상 최초. 그리고 영화 속 라스트 대방동 교전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영화 <스피드>에서 사용된 특수버스가 제작, 동원되었다. 스펙타클한 버스 질주 장면과 달리면서 버스 내부를 촬영하는 고난도 촬영을 가능케하기 위해 영화 <스피드>에서 사용한 것과 똑같은 특수버스 2대를 각각 2억여원을 들여 제작한 것.
<실미도>의 주연은 31명... 고정캐스트만 70여명, 엑스트라 1,000여명 출연!
주연배우 설경구, 안성기 외 배우, 스탭 전원은 모두 입을 모은다. <실미도>의 주연은 31명이라고... 이들은 극 중 훈련병 역할의 대부분 신인배우들. 처음 훈련병 모집 오디션에만 총5,0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고 그 중 엄선, 31명의 훈련병들이 구성된 것. 이들 31인의 훈련병들은 주인공 설경구를 비롯, 주․조연을 막론하고 쥐도새도 모르게 북에 침투해 임무를 수행하고 살아나올 정도의 실제 '실미도부대원'들의 동작과 눈빛 하나까지 필름에 담을 수 있도록 특수 훈련을 받았다. 이렇듯 또 한 번 한국영화사에 최다주연이라는 기록을 세운 <실미도>는 그 외에도 고정캐스트에만 70여명의 배우가 캐스팅되었고 엑스트라 1,000여명이 동원되어 그 당시 실미도에 존재했던 실제인물 하나하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면서도 역사 속에서 지워져야 했던 '실미도 사건'. 알아서 괴로웠고 '설마...'하며 상상치도 못했던 그 숨겨진 이야기가 드디어 공개된다. 한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실미도 684부대'를 소재로 한 '실미도 프로젝트'는 근 10여년동안 '영화계의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것이었다. 32년을 기다려 온 진실, 그 목격자이자 희생자였던 684부대 31인의 훈련병들이 겪은 3년간의 극비실화를 쫓는 영화 <실미도>. 2003년 12월, 거부할 수 없는 31명의 드라마틱한 운명과 드디어 조우한다.
한국영화 흥행의 마이다스 강우석 감독과 <박하사탕><오아시스>로 최고의 연기력을 선보인 설경구가 <공공의 적> 이후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췄다. 그들이 이미 보여준 <공공의 적>에서의 탄탄한 호흡은 영화 <실미도>에 대한 기대를 최고조에 달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국민배우 안성기와 허준호, 정재영, 강신일, 강성진, 임원희 등 이들만으로도 한국영화 5~6편은 찍을 수 있다는 내로라 할 주연급 배우들이 총출동, 한국영화 최정예부대의 비범한 파워를 보여준다.
'실미도사건'은 무엇인가?
1971년 8월 23일 이른바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명명된 그 날의 사건에 대해 언론은 그들이 정말 '북파부대'라면 건국 이래 최대의 파란을 몰고 올 사건이었기에 취재에 열을 올렸으나 어느 매체도 성공할 수 없었다. 사건 발생 3일만에 정래혁 국방장관, 김두만 공군참모총장 등 정부와 군 관계자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고 살아남은 4명의 훈련병들도 바로 사형되었다. 그렇게 '실미도 사건'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듯 했으나 '국민의 정부' 이후 HID, AIU 등 국군 산하 첩보부대들의 존재와 인권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실미도사건' 에 대한 재조명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부대의 공식명칭은 '오류동 정보부대'로 불리던 공군 제 7069부대 소속 2325전대 209파견대.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앞까지 침투했다 무산된 '1.21 김신조 사건'에 놀란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가 계획한 보복조치로 창설되었다. 사형수, 무기수, 일반 제소자들이 포함된 사회 밑바닥 계층을 포섭, 작전성공 시 모든 형벌 취소 및 전과기록 말소 등 정부로부터 새 삶을 보장 받는 조건이었다. 1968년 4월에 만들어져서 '684부대'로 불렸던 이 부대는 김신조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됐으나 훈련도중 사고, 탈출, 처형 등으로 7명 사망, 결국 24명이 최후까지 살아 남는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북파되어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 목을 따오는 것'이었다.
실미도에 훈련은 없었다. 뛰고 또 뛰는 훈련병들 뒤엔 언제나 실탄을 장전한 기간병들이 있었던 것. 그들은 인민군 말투에 인민군가, 인민군 제식훈련 등 철저하게 인민군식 훈련을 받았다. 처음엔 오합지졸이었던 훈련병들은 발꿈치로 날아드는 실제사격과 단체구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지옥훈련을 통해 단 3개월만에 북파 가능한 인간병기가 되었다. 부대가 창설된 지 4개월만에 첫번째 실전명령이 떨어져 바닷길로 북에 침투를 시도하지만 상부의 저지로 중도무산된다. 이후 3년 4개월간 '출정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의 긴긴 기다림은 시작된다.
그 사이 섬 밖 육지의 상황은 처음 실미도부대를 창설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국제 데땅트와 함께 남북 화해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고 중정부장이 교체되는 등 급격한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덧 '구 시대의 유물' 이자 '유령부대' 가 되어 버린 실미도 684부대, 결국 그들을 제거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실미도훈련병들에게 일반사병들이었던 담당 기간병들은 속수무책이었고, 단 십여분만에 실미도를 접수한 훈련병들은 인천으로 상륙, 송도외곽에서 버스를 탈취, 서울로 향한다. 전군 비상경계령이 발동된 가운데 이들은 진압군과 교전 끝에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전원 자폭이라는 최후를 선택한다.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신속히 이 사건을 종결지었다.
왜 함께 청와대로 향했는가? 왜 전원자폭 했을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당시 훈련병들이 탈취한 버스에는 민간인 승객들이 타고 있었고 이들은 묘한 증언을 해 왔다. 훈련병들이 청와대로 가자고 했다는 것, 인질인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분명 버스 안에서 훈련병들이 먼저 총을 쏘진 않았다는 것. 이는 반대로 인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은 사격을 가했다는 얘기다. 그들은 왜 함께 청와대로 가려고 했을까? 왜 함께 전원 자폭의 최후를 선택했는가? 북파가능한 인간병기들이 뿔뿔이 흩어져 개별행동을 했다면 살아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무언가 '목숨걸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32년간 숨겨져 온 진실... 이제 말할 수 있게 된 지금, 그러나 그들은 사라지고 없다.
실미도 사건 일지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 24명의 훈련병 탈출 행동 개시
6시 15분 실미도-공군부대간 통신두절. 24명의 기간병 중 6명만이 생존. 교육대장 김순응 준위 외 12명 사살, 6명 익사. 총 18명 기간병 희생.
낮 12시 20분 탈출 훈련병 24인 인천 독배부리 해안 상륙
12시 53분 첫번째 버스탈취, 서울로 향하다, 인천 송도역 삼거리, 대기중이던 육군 24명과 총격전 2명 중상
13시 10분 1차교전 - 인천 옥련고개
13시 20분 두번째 버스탈취, 인천 주안사거리 - 간석동고개
13시 30분 인천 소사 삼거리 경찰관 사살
13시 38분 인천 신양촌 검문소 경찰관 사살
14시 15분 서울 진입,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버스운전사 탈출
14시 25분 마지막 교전,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
"확실히 안에서 먼저 쏘진 않았다. 밖에서 먼저 쐈다" - 사건당시 버스승객 증언
일부 수류탄 자폭, 4명 생존
8월 25일 정래혁 국방장관 경질
1972년 3월 10일 오전 10시경, 4명의 생존자 사형 집행
1972년 7월 4일 남북 7.4 공동성명 합의, 평화통일 협약, 남북 무장도발 금지 조약 체결
강우석 VS 설경구, 최강콤비와 국내 초일류 제작진
<실미도>라는 이름하에 또 하나의 최정예특수부대로 거듭나다!
한국 최고의 흥행감독 강우석과 대한민국 최고 연기파배우 설경구가 <공공의적> 이후 다시한 번 호흡을 맞췄다. 한국영화 흥행의 미다스 강우석 감독과 자타가 공인하는 설경구의 폭넓은 연기력의 만남, 그리고 여기에 <접속><공동경비구역JSA><공공의적> 등의 국내최고의 실력을 소유한 김성복 촬영감독, <투캅스>부터 <공공의적>까지 강우석 감독과 호흡을 맞춰 온 신학성 조명감독 등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실력파들이 합세해 실미도부대 못지않은 또 하나의 '최정예특수부대'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극비프로젝트를 완수해 냈다.
한국영화사상 최장거리 로케이션! 최고의 셋트 제작비!
'실미도 부대' '대방동 교전지' 등 그 파국의 시간을 완벽히 재현하라!
2003년 최고의 화제작, <실미도>는 강원도-부산-인천-실미도-몰타-뉴질랜드-제주도-부안-파주에 이르는 7개월간의 최장거리 로케이션을 감행해야 했다. 최고의 수중 침투장면을 위해 '지중해 몰타 MFS 스튜디오' 로케이션과 겨울훈련 장면을 위한 '뉴질랜드' 로케이션에만 각각 7억원과 5억여원이 소요된 엄청난 작업이었다. 또한 부산 법정세트, 전라북도 부안의 대방동 세트, 실미도 훈련장 세트 등 <실미도>세트는 철저한 고증과 총 30여억원의 대규모 제작비가 집중되기도 했다. 이는 31명의 전사와 함께 역사 속에 묻혀간 그 때 그 시간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제작진의 굳은 의지에 의해 필수불가결한 규모였다.
세계최대의 CH-47D 시누크 헬기 동원, <스피드>의 특수제작버스 2대 직접 제작
실미도까지 배를 통해 운반된 촬영장비들은 실미도의 산 위까지 헬기에 의해 옮겨져야 했는데 이때 사용된 것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CH-47D 시누크 헬기 일명, '라이트테일'이었다. '1회수송에만 7천만원' 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실제 실미도 섬 중앙 산꼭대기에 크레인 2대와 발전기를 옮기는 이 힘든 작업은 국내영화 제작사상 최초. 그리고 영화 속 라스트 대방동 교전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영화 <스피드>에서 사용된 특수버스가 제작, 동원되었다. 스펙타클한 버스 질주 장면과 달리면서 버스 내부를 촬영하는 고난도 촬영을 가능케하기 위해 영화 <스피드>에서 사용한 것과 똑같은 특수버스 2대를 각각 2억여원을 들여 제작한 것.
<실미도>의 주연은 31명... 고정캐스트만 70여명, 엑스트라 1,000여명 출연!
주연배우 설경구, 안성기 외 배우, 스탭 전원은 모두 입을 모은다. <실미도>의 주연은 31명이라고... 이들은 극 중 훈련병 역할의 대부분 신인배우들. 처음 훈련병 모집 오디션에만 총5,0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고 그 중 엄선, 31명의 훈련병들이 구성된 것. 이들 31인의 훈련병들은 주인공 설경구를 비롯, 주․조연을 막론하고 쥐도새도 모르게 북에 침투해 임무를 수행하고 살아나올 정도의 실제 '실미도부대원'들의 동작과 눈빛 하나까지 필름에 담을 수 있도록 특수 훈련을 받았다. 이렇듯 또 한 번 한국영화사에 최다주연이라는 기록을 세운 <실미도>는 그 외에도 고정캐스트에만 70여명의 배우가 캐스팅되었고 엑스트라 1,000여명이 동원되어 그 당시 실미도에 존재했던 실제인물 하나하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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